| 추억의 송정리역 ③ gsjn@daum.net |
| 2024년 07월 08일(월) 10:48 |
|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1945)이 되자 물류 중심지였던 송정리역을 중심으로 도로가 하나둘씩 개설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송정- 광주 간, 송정- 나주 간 도로가 개설되었고, 1970년대 들어서 송정리- 함평, 영광 간의 도로가 개설되었다. 1960년대 말. 광주- 송정 간 비포장도로에 편도 2차선으로 아스팔트가 깔렸다. 새로운 도로 문화의 첫걸음이었다.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1958년) 송정리역의 모습은 기차의 요란한 기적 소리 와 칙-칙 폭폭! 무겁게 출발하는 소리와 더불어서 대합실 내외의 확성기 안내 방송 소리, 그리고 분주한 사람들의 북적거림으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대합실 입 출구에는 짐을 운반하는 짐꾼들의 지게, 짐바리 자전거, 손수레(리어카)가 대기하고 있었다.
∎북새통, 시내, 외 버스 정류장
대합실 앞 광장 한 편에는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송정리역에서 광주로 오가는 천일버스가 하루에 오전 오후로 두 번 정도 운행했다. 소위 시내버스 역할을 하면서 10여 군데 승강장을 거쳐 광주 종점까지 운행한다.
비포장의 울퉁불퉁한 송정 시가지 도로를 지나면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린다. 시내 상가들은 메마른 거리에 물 뿌리는 조대로 하수구 물을 퍼서 뿌리곤 하였다. 또 비 오는 날이면 움푹 팬 웅덩이 흙탕물을 치고 달린다. 거리의 사람들과 점포는 물벼락을 맞는 일이 다반사다. 어린 우리들은 홀랑 벗고 빗속을 뛰어다니며 소리 지르며 놀았다. 그리고 잊을만하면 가끔 땅 깎는 중장비 차가 울퉁불퉁한 도로를 밀어 다듬기도 하였다.
그리고 4~5년이 지난 뒤 나주, 함평, 장성 등 인접 시군에 가는 시외버스는 하루에 한 번 정도 버스가 운행했다. 광주 시내에 버스회사마다 공동주차장이나 버스 터미널을 운영하였다. 동구 대인동 광주역 앞에 전남여객과 동방여객 터미널이 있었으며, 대인동과 금남로 사이에 광주여객이, 금남로 3가에서 수기동 사이에 금성여객 터미널 있었다. 송정리역 버스 정류장은 지나가는 승강장에 불과했다. 버스가 진입하면 대기하던 승객들과 열차에서 내린 손님들이 일시에 몰려 큰 혼잡을 이뤘다. 매표원은 팔에 완장을 차고 손에 버스표 묶음을 들고 큰 소리로 “영광 함평이요!” “나주 영산포요!~”외쳐댄다. 좌석을 차지하기 위해 줄을 선 승객들에게 차례로 차표를 끊어주면서 승차시킨다. 버스에 태울 수 있는 만큼 빽빽하게 채우고 여자 차장은 차 문에서 몸으로 밀어 넣으며 문밖 손잡이에 매달려 오라이! 하면 출발하였다. 비포장도로여서 도로가 울퉁불퉁하여 달리면서 버스 안의 사람들이 짐처럼 자동 정리된다. 사람을 짐짝 취급하였다. 정류장에서 버스 안에 승객들에게 선물꾸러미를 팔기 위해서 버스 차창 밖에서 사과와 배 바구니 그리고 과자류 봉지를 들어 올려 보이며 창문을 통해 파는 행상들이 버스를 둘러싸 장사진을 이루었다.
∎ 송정리역과 VIP
송정리역을 이용하는 귀빈들 즉 국회의원, 장관, 장군들이 오갈 때, 그들을 맞이하는 군악대가 동원되어 우렁찬 악기 소리가 메아리쳤다. 또 그들을 영접하거나 배웅하기 위해 군장성급 장교들이 대합실을 메우고 광장에서는 장병들이 늘어서 맞이하였다. 헌병 캄보이 차량을 앞세운 VIP가 탄 차량이 출발하면 그 뒤에 지프차와 군용차량들이 따라가곤 하였다.
내가 중학교 2학년쯤(1962년경)에 박정희 대통령이 전남도청을 순방하기 위해 특별 열차로 송정리역에서 내려 대통령 전용 승용차로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역 앞 거리에는 환영인파가 모였다. 대통령 경호는 10여 일 전부터 하는데 서울역에서 송정리역까지 경찰과 군인들이 철도 양쪽을 2중으로 줄지어
|
gsjn@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