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억의 송정리역 ⑤ gsjn@daum.net |
| 2024년 07월 27일(토) 1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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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어린 시절 1950년대 이후 송정리역 앞 주변을 기억하는 이야기다. 송정리역 대합실 앞 너른 비포장 광장과 연결되는 송정 시가지는 비포장 신작로 양편에 단층 상점들이 이어져 호남동, 명동, 영동, 원동 거리가 형성되었다.
송정리역 앞 상가의 첫 번째 건물로 일본식 3층 목조건물이 우뚝 서 있어 매우 뛰어나 보였다. 송정리의 랜드마크 격인 ⌜신신다방⌟ 건물이다. 일본인이 지어놓은 이 건물은 해방이 되자 한국인 고 박경섭씨가 인수하여 성업했다. 1층은 ‘신신당’으로 아이스케이크 점이 있었고, 2층은 신신다방, 3층은 신신당구장이 있어 사람들이 분주하게 들끓었다.
⌜신신당⌟ 아이스케이크는 막대기에 끼어 있는 얼음과자다. 얼음과자를 나무 상자 통 안에 두꺼운 보자기에 싸서 넣고 그 통을 어깨에 메고 ‘아이스케이크!~ 외치며 거리를 다니면서 팔았다. 이 아이스케이크 점이 송정 시가지에만 신신당, 평화당, 대성당, 고려당 네 곳이 있을 정도로 성행했다. 그때는 다른 군것질할 간식거리가 겨우 길거리에서 파는 찐 고구마, 감자 꾸러미 정도여서 여름철 아이스케이크와 시원한 삼각 비닐 주스가 인기였다.
⌜신신다방⌟은 만남의 장소로 전국에 유명세를 낸 업소다. 주로 신사들이 들락거렸다. 송정리역 열차 이용 승객과 군인, 각종 물류 유통의 중심으로 유동 인구가 끊이지 않았던 역세권 지역에서 꿈과 희망과 낭만을 만들어 낸 유명한 장소가 된 것이다. 특히 상무대 군 장병들은 가족들이 면회 오면 반드시 신신다방에서 만나게 되어있어서 만남과 이별이라는 서곡이 끊이지 않았다. 송정리역을 이용하는 화물 사업가들은 이 다방에서 만나면 어떠한 일이든지 해결하는 장소로 유명했다. 권력기관과의 연락과 만남이 쉽게 이루어지고, 수사기관이나 군부대와의 협조가 잘 이루어져 모든 문제를 풀어내는 로비 장소였다. 그리고 주변에 숙박업소와 요식업소를 이용한 고객들은 매일 같이 단골손님이 되어 이용하였다. 해마다 혼수기가 되면 남녀가 맞선을 보는 장소로도 유명했다. 이렇게 객지에서 오는 손님과 지역 사람들이 유익하게 이용하던 신신다방은 만남의 문화공간으로 한 세기를 누렸다. 1990년대 광-송간 도로 확장 사업으로 이 건물은 철거되기에 이르러 우리 곁을 떠나게 되었다. 격변하는 시대의 길목에서 신신다방이라는 명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송정리역과 특정 지역 1003번지
해방(1945) 이후 한국전쟁(1950)을 치른 후 지금의 상무지구에 후방 안보 핵심부로 제2군사령부가 창설되었다. 그러자 송정리역은 하루아침에 달라지기 시작했다. 송정리역에는 군 전용 열차인 ‘상무호’ 종착역이 되어 푸른 제복의 군인들이 송정리역 주변을 메웠다. 역대합실에 TMO(수송)란 장병지원단이 상주하면서, 헌병대, 방첩부대(보안대)가 있어 장병들에게 치안과 서비스가 제공되었다. 송정리역 주변은 장병 위주의 영업집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식당, 하숙집, 여인숙, 여관들, 그리고 접대부를 고용한 주점들이 줄지어 생겼다. 이들은 거리에서 서로 손님을 유치하기 위해 호객행위가 난무했다. 그즈음에 송정리 1003번지 골목에 하숙집이 들어서면서 윤락녀들이 고용되어 몸을 파는 성매매가 성행하여 문전성시를 이뤘다. 일명 ‘사창굴’이라고 했다.
좁은 골목 양편에 여인숙, 하숙집들이 즐비하게 있고 아가씨들이 거리에 나와 “쉬었다 가세요!” 호객행위로 자기 방으로 데려가곤 하였다. 여느 젊은 총각들이 총각 딱지를 떼는 곳이기도 하다. 낮에도 출입하는가 하면, 밤에는 취객들이 비몽사몽 골목길을 누비며 젊은 끼를 자랑했다. 열차 손님과 취객들이 매일 혼잡스럽게 움직이지만 손님 대부분은 군 장병들이 더 많았다. 이러다 보니 사고 친 사람들이 수시로 일어나고 매일 같이 경찰과 헌병들이 골머리를 앓을 정도로 애를 먹는다. 그리하여 ‘송정리 1003번지’라는 특정 지역 이름이 유명세를 내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는 바람에 중범죄인들이 피신처나 은신처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전국에서 강력범죄가 일어나면 수사 대상으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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