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리역과 송정오일장터 ⑥

‘송정리역’ 광주·전남 관문 교통 요충지 상업 중심
전통시장 ‘송정오일장터’ ‘매일 시장’ 시대적 풍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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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1월 20일(월) 11:39
∎ 시대적 풍요 도시, 송정리
필자가 어린 시절 1950년대 이후에 보았던 송정리역과 송정 오일장 이야기다.

송정리는 ‘송정리역’이 있어 광주, 전남의 관문이요 교통 요충지여서 상업의 중심지였고 전통시장 ‘송정오일장터’와 ‘매일 시장’이 있어 남도 지역의 경제 활동의 중심지로 시대적 풍요를 누렸던 곳이다. 경제 도시답게 생산 공장들이 산재했다.

도산동에 쌀 도정공장(방앗간)과 박하 공장, 그리고 소와 돼지를 잡아 가공하는 도축장이 있었고, 술을 제조하는 주조장(술도가)이 여러 개 있었다. 서부 주조장과 송학 주조장의 막걸리가 유명했다. 두부 만드는 집, 그리고 서도산에 있는 금봉주조장에서는 정종을 생산해 널리 팔렸다. 송정리는 물이 좋기로 유명하여 동네 유지들은 청주를 빗어 선물하거나 나눠 먹었다.

또 우산동에 광산 잠사 공장이 있어 누에에서 실을 생산하고 부산물로 번데기가 나와 우리들의 간식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명동 뒷길 광산경찰서 앞에 이경도 씨가 경영하는 솥부리(주물) 공장에서는 ‘쌍표 솥’과 쟁기 보섭(날) 등 농기구 등을 생산해 전국으로 팔려나갔다. 그리고 목재를 제재하는 중앙제재소, 그리고 평동면 연산리 점등 마을에는 질그릇 굽는 가마터가 있어 항아리, 옹구 등 생활용 질그릇들이 생산되어 장터 옹구전에서 팔렸다. 이곳 연산리 점토가 좋았던지 그 후 도예가 무형문화재 조기정 씨의 ‘무등도예’가 자리 잡았었다. 그리고 연산리에 최초로 젖소 목장이 들어섰다. 필자가 중학교 시절(1962년)에 정광중학교 고재우 농업 선생이 최초로 홀스타인 젖소 목장을 지어 우유를 생산해 유리병에 담아 가정배달을 시작하였다. 그 후 연산리에 널따란 도립목장이 자리하기도 했다.

∎ 송정 오일장 둘러보기

‘송정오일장’은 송정리 명동과 영동 거리 동남쪽 용보촌 쪽으로 ‘장터‘가 있어 3일과 8일에 장이 열리는데 5일 만에 장이 선다고 해 ‘송정오일장’이라고 한다. 장날에는 송정리역과 송정 시가지와 송정 오일장터가 함께 장을 맞이하게 되어 사람들로 붐볐다.

영광. 함평. 나주 등지에서 시외버스를 이용해 장 보러 오는 사람들이 송정리역에서 내려 송정 시가지를 지나 오일장터로 모여들고, 가까운 평동, 동곡, 삼도, 본량, 하남 사람들은 걸어서 장 보러 나올 때 자기 집에서 생긴 달걀 꾸러미, 빗자루, 땔감(솔잎 뭉치) 등, 그리고 쌀, 보리, 콩 등 농산물과 병아리와 닭, 오리, 강아지 등을 지게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나와 송정 시가지의 점포나 장터 입구 거리에서 팔고 필요한 것들을 구매하기 위해 장터로 모인다.

송정오일 장터로 가는 길은 여러 군데다. 명동 송정 극장 사거리에서 광산경찰서 뒤, 도랑을 타고 들어가고, 또 광산구청 앞 사거리, 비빔밥 할머니(최처자) 집, 중앙제재소(김재병)부터 장을 이뤘다. 그리고 영동 송정여자중학교 앞 우리 상회, 풍국상회, 한일철물점부터 장터를 이뤘다. 장터 안으로 들어가면 고정된 점포들과 양철 지붕만 있는 길쭉한 전들이 있었다.

싸전에서는 곡물들을 한 되, 두되, 한 말 등으로 되와 홉으로 재서 팔았다. 어물전에서는 소금에 절인 간 고등어, 갈치 조각을 벼 새끼(새내키)로 엮어서 한 손, 두 손 묶음으로 팔았다. 포목전에서 광목, 천 등을 한 마, 두마, 대자로 재서 팔고 샀다. 물 방에서는 양잿물과 천 염색약 등 화학 재료 등을 손저울에 떠서(달아서) 팔고 샀다. 그리고 옹구 그릇 전, 대바구니 전 등이 있었다. 그리고 장터 맨 끄트머리 너른 곳에 있는 소 전(우시장)에서는 소와 가축들을 사고팔고, 그 주변 주막에서는 국밥, 국수, 막걸리가 인기다. 국수는 밀가루 국수 가락을 멸칫국물이나 설탕물에 말아서 먹는 정도였다.

대장간에서는 낫, 호미 등 농기구를 만들고, 거리 노상에서는 닳아지거나 찢어진 고무신을 때우거나 구멍 난 냄비 등을 땜질하는 등 수리하는 곳이 성행하였다. 그리고 엿장수들이 엿을 지게에 지고 가위소리를 내면서 엿을 떼어 팔았다. 또 북을 치면서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동동구루무(크림) 화장품이 인기였다,

∎ 장터 굿 마당과 난장판

장날이면 볼 수 있는 소리 굿 마당이 볼만했다. 장터거리 한쪽에 광목으로 포장을 쳐 놓고 입장료를 받으며 굿 극단을 열었다. 필자의 어렸을 적 어렴풋한 기억으로 흰 두루마기 입은 박00 선생이나 임방울 선생의 얼굴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리고 매년 추석 명절 후에 10여 일간 난장을 텄다. 일명 투전판(노름)을 벌이는 것이다. 장터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외지에서 몰려든 노름꾼들이 모여들어 난장판을 벌였다. 창호지에 화투 그림을 그려 접어서 만든 화투 놀이, 윷놀이 등으로 도박판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징 소리와 함께 씨름대회를 열어 마지막 결승 날에는 장사에게 황소 한 마리를 상으로 주었다. 날마다 구경꾼들이 모여 먹고 마시면서 말 그대로 난장판에서 배고픈 시대에 풍요를 즐겼다.

∎ 장날 거지들(동냥치, 부랑아)

그 당시(1950대) 가난하고 못사는 시대에 사는 우리 어린이들은 대부분 영양실조(부족)로 코에 코딱지, 머리에는 부스럼, 얼굴은 버짐이 가시지 않았다. 특히 집이 없고 가난해 먹을 것이 없는 전쟁고아나 부랑아, 거지들이 장날이면 깡통을 들고 장터와 송정 시가지 점포들을 돌면서 동냥을 구걸하며 다니면서 밥이나 반찬, 쌀이나 보리, 가게 물품, 푼돈을 얻어갔다. 거기에는 상이군경, 문둥병 환자들도 동냥을 구걸하며 다녔다. 그들은 술에 취해 횡포를 부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시대가 바뀌어 가면서 거지들과 부랑아들을 먹여주고 재워주는 ‘갱생원’이 생겨 당시 권투 사범 이경배 씨가 운영했다. 그들은 대나무로 엮어서 만든 커다란 넝마를 등에 메고 다니면서 거리에 휴지나 폐품을 수거하는 넝마주이 활동을 하게 되면서 거리에 구걸하는 거지들이 점점 줄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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